
반지의 제왕 1편 "반지 원정대"를 보고 나서 간달프와 보로미르가 죽는 걸 보고 한동안 충격에서 못 벗어났던 기억이 납니다. 원정대의 시작부터 주요한 인물들의 죽음은 작가가 의도한 영화의 극적인 요소를 더하는 효과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편 '두 개의 탑'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작하는데도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더라고요. 원정대가 세 팀으로 쪼개져서 각자의 여정을 이어가는 구조가 처음엔 산만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보니까 이게 정말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전개였습니다. 1편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저와 아내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2편까지 흐름 그대로 반지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뿔뿔이 흩어진 원정대, 그래서 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프로도와 샘이 골룸을 만나고, 메리와 피핀이 우르크하이에게 납치되고, 아라곤 일행이 그들을 쫓아가는 이 세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이 정말 탁월했습니다. 시간대와 장소들이 정신없이 전개되어 자칫하면 내용이 산만하고 영화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었지만, 훌륭한 연출과 전개 방식은 감탄을 자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골룸이 반지에 맹세하며 프로도를 따르겠다고 할 때 그 표정 연기는 지금 봐도 소름 돋는 수준이고요. 솔직히 CGI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감정 표현을 섬세하게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메리와 피핀은 아이센가드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호빗 특유의 생존력을 발휘하죠. 제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이 둘이 팡고른 숲에서 엔트들을 만나는 부분입니다. 나무수염이 회의를 하는데 엔트들 언어가 워낙 느려서 답답하다가, 피핀이 사루만의 만행을 직접 보여주면서 엔트들이 각성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카타르시스가 넘칩니다.
아라곤 일행은 로한 기사 에오메르와 만나고, 팡고른 숲에서 백색 마법사로 부활한 간달프를 재회하는데요. 이 부분에서 간달프의 부활이 영화에서는 간략하게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발록과의 전투부터 독수리들의 도움, 로스로리엔에서의 치유까지 긴 과정을 거칩니다. 영화는 러닝타임 때문에 축약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제대로 살렸다고 봅니다.
세오덴 왕, 판타지 속 가장 현실적인 용기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셨나요? 로한의 세오덴 왕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였다는 거요. 처음엔 사루만의 마법에 걸려서 완전히 무기력한 노인처럼 나오잖아요. 그런데 간달프가 치유하고 나서 정신을 차린 뒤의 모습이 진짜 멋있었습니다.
아라곤이나 레골라스는 판타지 영화 주인공답게 두려움을 찾을 수 없고, 세계관 최강자들다운 전투력은 오히려 현실감이 좀 떨어지는데요. 세오덴 왕은 달랐습니다. 헬름 협곡으로 가는 길에 와르그 부대에게 습격당하고, 사루만 대군의 규모를 듣고는 확실히 겁을 먹습니다. 나팔산성의 방어력만 믿고 안일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요.
제 경험상 이런 입체적인 캐릭터가 훨씬 더 공감이 많이 됩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백성들을 위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 절망적인 순간에도 마지막 진격을 결심하는 용기가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면서도 진정한 용맹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김리가 나팔을 불며 최후의 돌격을 시작할 때 세오덴 왕이 함께 앞장서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느껴집니다.
헬름 협곡이라는 이름 자체가 과거 '무쇠 주먹' 헬름 왕이 홀로 적들을 주먹으로 때려잡으며 지켜낸 곳이라는 역사를 알고 나면 세오덴 왕의 선택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 전통을 이어가는 왕의 모습이었다고 봐야 할까요.
헬름 협곡 전투와 엔트들의 복수, 정말 완벽한 클라이맥스였다
2편의 백미는 역시 헬름 협곡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압도적인 수의 사루만 군대가 밀려오는데 로한 병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때 로스로리엔 엘프들이 지원군으로 와주는 장면은 원작에 없는 각색이지만 영화적으로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과 엘프가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봅니다.
화약으로 성문이 뚫리고 성이 함락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서 해가 뜨는 동쪽 언덕 위에 간달프와 에오메르가 나타나는 장면은 진짜 볼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수많은 기병대가 언덕을 타고 내려오며 적들을 쓸어버리는 그 장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엔트들이 아이센가드를 공격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죠. 숲이 파괴된 걸 본 나무수염의 분노, 댐을 파괴해서 홍수를 일으켜 사루만의 본거지를 초토화시키는 장면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느리고 평화로운 존재들이 진짜 화났을 때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명장면이었어요. 불이 붙은 엔트가 홍수에 머리를 담가 물을 끄는 장면 같은 소소한 재치는 다시 한번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프로도와 샘은 모르도르 검은 문 앞까지 갔다가 골룸이 제안한 비밀 길로 방향을 틀고, 중간에 파라미르를 만나는데요. 파라미르가 반지를 탐내는 장면은 원작과 좀 다르게 각색됐지만, 결국 그도 반지의 위험성을 깨닫고 프로도를 풀어줍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골룸이 배신감을 느끼고 복수를 다짐하는데, 이게 3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복선이 되죠.
1편만 한 속편은 없다는 말이 있지만, 제 생각엔 2편이 전투씬이나 스토리 전개 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았다고 봅니다. 1편은 세계관을 소개하느라 속도가 느린 부분이 있었다면, 2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달려가거든요. 오크들과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징그러운 묘사가 많아지긴 했지만, 그런 역겨움도 반지의 제왕이 주는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3편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기대하면서 이번 후기를 마칩니다.